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르마 공국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교황]] [[바오로 3세]]는 이전 교황들로부터 대대로 이어오던 독점적인 권력 유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. [[밀라노 공국]]령 포 강 남쪽 지역이었던 [[파르마]]와 [[피아첸차]]는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가 물러난 이후 [[교황령]]에 흡수되었다. [[바오로 3세]]는 자신의 양자였던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제를 파르마 공작으로 임명했는데 밀라노 공국을 획득한 [[신성 로마 제국 황제]] [[카를 5세]]는 파르마 공국을 이전처럼 밀라노에 통합시키고 싶어했다. 황제의 조종에 의해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는 친황제파 [[반란]]이 일어났고, 이에 의해 초대 공작 피에르 루이지가 사망했다. 하지만 [[교황]] [[바오로 3세]]는 피에르 루이지의 아들 오타비오 파르네제가 재빨리 공작위를 잇게 했으며, 반란을 수습했다. 이로써 파르마를 흡수하려는 [[카를 5세]]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. 1559년 [[펠리페 2세]]와 [[앙리 2세]]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하여 [[이탈리아 전쟁]]을 마무리한 이후 파르마 공국은 [[스페인 제국|스페인]]의 영향권에 들어갔다. [[알레산드로 파르네제]]와 같은 공작은 스페인 장군으로 복무하기도 했다. 이외에 [[예수회]]가 파르마에서 활동하는 등 [[가톨릭]]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. 1731년 파르네제 가문이 단절되고, 혼인 관계였던 [[스페인]]의 [[보르본 왕가]]가 공작위를 계승했다.[* 마지막 공작의 누이 엘리자베트 파르네제의 아들 카를로(후일의 [[스페인 국왕]] [[카를로스 3세]])가 계승했다.] [[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]] 도중 [[합스부르크 제국]]의 [[카를 6세]]와 [[마리아 테레지아]]가 파르마를 양도 받았으나[* 파르마를 양도하는 댓가로 카를로는 [[나폴리 왕국]]과 [[시칠리아 왕국]]을 넘겨받았다.]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 도중 다시 [[스페인]] [[보르본 왕조]]에 넘어갔다.[* 카를로의 동생 펠리페가 파르마 공국을 이어받았다.] 1802년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파르마 공국을 멸망시켰다. 나폴레옹은 파르마를 프랑스 직할령으로 병합했다가 [[프랑스 제1제국]]이 [[나폴레옹의 몰락|몰락]]한 1814년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이 부활했다. [[빈 회의]] 이후 파르마 공국은 오스트리아 공주이자 나폴레옹의 황후였던 [[마리 루이즈]]의 영지가 되었다. [[마리 루이즈]]가 사망하고 다시 [[보르본 왕가]]가 계승했지만 [[2월 혁명]]의 여파가 파르마까지 번져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. 1848년 제1차 [[이탈리아 통일]]전쟁으로 [[사르데냐 왕국|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]]이 일시적으로 파르마를 병합했으나 [[요제프 라데츠키]]가 이끄는 [[오스트리아 제국군]]이 사르데냐-피에몬테군을 격파하여 다시 보르본 왕가가 복귀했다. 이후 [[오스트리아 제국|오스트리아]]가 사실상 파르마를 [[속국]]화했다. 1859년 [[이탈리아 통일전쟁]]이 재개되자 파르마에서는 이웃 [[토스카나 대공국]], [[모데나 레조 공국]], [[교황령]]의 [[볼로냐]] 일대 지역과 함께 혁명이 일어났고, 외국 지배자들이 축출되었다. 이후 혁명이 일어난 중부 지역은 서로 '중부 이탈리아 연합주'(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)를 구성하여 국민 투표를 거쳐 [[사르데냐 왕국|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]]에 병합되었고, 이후 [[이탈리아 왕국]]으로 이어진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